개인 해설을 준비하면서 처음 방문했던 남산 일제강점기 유적.
지난 번 중구 항일무력투쟁 유적 답사에서는 남산의 통감관저 터 정도를 보고 지나갔다면,
오늘은 남산을 주제로 일대를 꼼꼼히 돌아봤다.
남산 일대는 유적지가 많아서 답사할 곳이 매우 많다.
남산 답사 기록은 두번 나눠서 업로드 하려고 한다.
| 남산 통감관저 터 일대 답사 코스 [출발지 : 명동역] → [통감관저 터(남산일본공사관)/기억의 터] → [서울유스호스텔(중정부 본관, 6별관 터)] → [소방재난본부(중정부 사무동)] → [옛 주자파출소 터] → [문학의 집(중정부장 공관 터] → [대한적십자사 서울 사무소] → [조선총독부 왜성대 청사 터] → [숭의여자대학교 본관(경성신사 터), 갑오역기념비터] |
┃0. 답사에 앞서, 경성 본정(혼마치) / 남산


현재의 명동과 남산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늘의 답사지 남산을 돌아보기에 앞서 명동과 남산이 궁금해졌다.
간단히 살펴보자.
명동은 조선시대 한성부 행정구역 중 '남부 명례방'으로 불리던 곳으로 주로 주택가가 밀집해있었다.
일제강점기 남산자락에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개발을 시작하자
현재의 모습처럼 번화가로 발전했다.
명동은 '본정'이라 불렸고 행정구역 상 본정1정목, 본정2정목 등으로 불렸는데,
본정은 일본어로 '혼마치'라 하여 번화가를 의미한다고 보면 되겠다.

남산에서 본 남산 자락과 명동 일부 모습.
오늘 답사 코스에서 등장할 장소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에서 살짝 우측 조선총독부 왜성대 청사,
좌측 가운데 큰 팔작지붕 건물이 동본원사,
좌측 끝에 뾰족한 첨탑 건물이 명동성당이다.
┃1. 통감관저 터(남산일본공사관) / 기억의 터


명동역 1번 출구로 나와 기억의 터 안내 벽면을 지나고 오르막길로 향한다.


남산예장공원을 지나가는 편한 산책로가 있고,
적십자사와 소방재난본부 건물을 지나가는 인도가 있다.
가는 길에는 예장공원 산책로를 이용해본다.


산책로에 철쭉들이 축 늘어져 있다.
4월 말이었는데도 기온이 꽤 높다.

구름사다리같은 길을 나와 계단을 잠시 오르면 통감관저터와 기억의 터가 나온다.
이 날은 다같이 답사를 오신 어르신들도 계셨다.
평소같으면 소방재난본부 직원들 외에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다.



통감관저터는 정확한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꾸준한 관심을 가졌던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2006년 발견했다.
은행나무 앞 잔디밭에서 판석 3개를 발견했는데 이것이 하야시곤스케 동상의 좌대였다.
이를 통해 정확한 통감관저터 위치가 알려졌다.
한쪽에는 건물 기단인지 동상 받침인지 모를 돌무지가 있다.
안내판도 없고 색깔로 봤을 때 복원해놓은 것이 분명하다.
앞쪽으로는 거꾸로 쳐박힌 동상 표석이 전시되어있다.
'남작하야시곤스케군상' 글씨가 거꾸로 보인다.
2006년 발견됐던 하야시곤스케 동상 돌 조각 3점을 활용해
2015년 8월, 을사늑약의 치욕을 잊지 않고자 거꾸로 박아버렸다.
(진짜 속시원하다)


그럼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하야시곤스케는 누구인가? 왜 하야시의 군상이 남산자락에 세워졌나?
하야시곤스케는 1899년 주한일본공사로 부임해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한 인물이다.
일본 측 대표로 을사늑약에 서명했으며, 이후 이토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에 올랐다.
하야시는 러일전쟁 전후로 한일의정서, 제1차한일협정을 체결하여
일본에서는 유능한 외교관으로 평가받았으며,
일제는 1936년 12월 하야시의 희수를 맞아 기념 동상을 세웠다.


앞에 놓인 표석에는 크게 통감관저터와 작게 설명이 적혀있다.
뒤에는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2010년 8월 29일
신영복이 쓰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움'이라 적혀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사실, 한일강제병합 조약이 체결된 것은 1910년 8월 22일이다.
우리가 흔히 경술국치일로 알고 있는 8월 29일은 조약 공포일이다.
즉 대한제국의 통치권이 일본에 넘어갔다고 결정된 것은 22일의 일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통감관저의 모습.
한성조약 체결 여파로 남산에 세워졌던 일본공사관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며 육조거리 외부청사와 함께 통감부 건물로 쓰였고,
통감부 건물이 인근으로 이전하면서 해당 건물을 통감관저 건물로 사용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는 통감부 건물을 총독부로 쓰고
통감관저 건물은 왜성대 총독관저로 사용했다.
(일제강점기 총독관저는 총 3개로 경무대, 왜성대, 용산이 있었음)


통감관저터에 함께 조성되어 있는 기억의 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이야기를 담은 공간이다.
이곳은 올 때마다 제대로 보기가 어렵다.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는 마주할 때마다 정신적인 고통이 심해서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한 가지 중요한 점, 정확한 표기 방식은 위안부에 따옴표를 쓴 [일본군 '위안부']이다.
'위안부'라는 표현은 마치 자발적인 듯한, 위로하는 듯한 잘못된 뉘앙스를 풍긴다.
'위안부'는 가해자인 일제가 쓴 표현으로
우리는 의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문제임을 드러내기 위해 따옴표를 붙인다.


기억의 터에는 피해자분들의 이름이 새겨진 보라색 기둥들이 있다.
한쪽에는 피해자분들의 증언이 담겨있다.
가고 싶으신 분들은 증언 내용이 꽤 충격적이니 마음을 굳게 먹고 가시길 바란다.
피해자분들의 명복을 빌고
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도와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소방재난본부 쪽에서 언덕을 오르는 방향으로는
좌측에 보호수 은행나무와 우측에 보호수 회화나무가 있다.
두 나무 모두 굉장히 오래된 나무로 통감관저 시절부터 중정부 시절까지 이 곳을 지켜봐왔다.


현재 남아있는 통감관저 사진 속에서도 은행나무와 회화나무를 만날 수 있다.
비슷한 구도에서 찍으니 두 나무의 모습도, 도로의 모양도 그대로이다.
┃2. 중정부 관련 건물(서울유스호스텔, 소방재난본부, 문학의 집 등)

통감관저터 뒤쪽에 작은 계단이 있다.




계단을 올랐다가 다시 내려가면 깊숙히 숨겨진 곳에 커다란 건물이 있다.
서울유스호스텔, 이곳은 과거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가 있던 곳이다.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쿠데타 세력이 세운 중정부는
국가 안보를 목적으로 한다는 명분과 달리,
박정희-전두환 시기 간첩 조작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던 곳이다.


본관 앞에 작게 서울종합방재센터가 있다.
이 인근은 중정부 제6별관이 있던 곳으로 지하 고문실로 불리며 고문이 자행되었다.
2017년 해체 작업 중 일본군 관사 흔적도 발견됐다.



현재 이곳 일대는 '남산인권숲'으로 조성되어 있다.
인권, 민주화운동 관련 답사 코스로 많이 오는 듯 하다.
(이 글은 일제강점기 시기에 초점을 두어 중정부 관련 내용은 우선 빠르게 넘어감)


통감관저를 벗어나 내려오면 소방재난본부 건물이 있다.
중정부 사무동으로 쓰였던 곳이다.





소방재난본부 좌측 구석으로 들어가면 '문학의 집'이 나온다.
이곳은 중정부 공관이 있던 곳으로 현재는 시민을 위한 작은 문화예술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서울시의 남산 제모습 찾기 계획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명동역 방향으로 잠시 내려가다보면 주자파출소 터 표석이 있다.
이곳은 중정부/안기부에 끌려간 이들을 면회하기 위해 지인 또는 가족들이 대기하던 곳이나,
실제로 만남이 이루어지긴 어려웠다고 한다.
끌려간 가족을 기다리며 얼마나 애탔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정부 시절 남산 일대 사진.
중정부/안기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웠다고 하니 이 사진 한 장이라도 남아있는게 다행이랄까
실제로 답사를 가보면 나무로 둘러쌓여 어쩐지 서늘하고 고립된 느낌이 가득하니,
인권의 소중함을 알고자 한 번쯤 직접 방문할 만하다.
┃3. 대한적십자사 서울 사무소(일적 조선본부, 동본원사)

소방재난본부를 지나 남산예장버스주차장을 넘어 작은 언덕길을 걷는다.


앞쪽에 대한적십자사 건물이 있다.
해당 건물은 대한적십자사 본부는 아니고 서울 사무소이다.
대한적십자가 일본 적십자 조선본부로 흡수될 때 이곳에 자리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 적십자가 들어온 것은 꽤나 오래됐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적십자를 들여왔다.
조선은 1903년 제네바협약에 가입했고,
적십자는 을사늑약 체결 후인 1905년 10월 27일 칙령 제 47호를 발표하며 시작됐다.
최초의 적십자사와 적십자병원은 함께 운영되었는데 위치는 경복궁 인근이었다.

그러나 대한적십자는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본 적십자사에 통합되어 일적 조선본부로 불렸다.
1919년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탄생해 대한적십자회로 부활했다.


적십자사에서 위로 올라가는 방향에 한양교회가 있다.
이 자리 일대에는 일제강점기 동본원사 경성별원이 자리했었다.

일본 불교의 대표적 종파인 정토진종 본원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 동본원사와 서본원사로 분리된다.
같은 종파가 두 계통(파)으로 갈라진 것이다.
포교를 목적으로 한 사찰 동본원사는 1877년 부산, 1890년 경성, 1910년 대구를 비롯해
인천과 목포에도 세워져 세력을 확대했다.
해당 종파는 불교의 교리를 거들먹이며 개인에게 전쟁 참여를 권하는 등 일본제국의 전쟁 미화 도구로 전락하기도 했다.
┃4. 조선총독부 왜성대 청사 터

반대편에서는 공사가 한창이다.
원래 서울에니메이션 센터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바로 이곳에 조선총독부 왜성대 청사가 있었다.


조선총독부 왜성대 청사 모습이다.
흔히들 조선총독부라고 하면 경복궁 앞을 가로막은 건물 모습을 떠올리기 십상이나,
경복궁 앞 조선총독부 건물은 1916년부터 착공해 1926년 완공했으므로,
그 이전에는 다른 건물이 쓰였다.
이전까지 쓰인 건물이 사진에 보이는 남산자락에 위치한 조선총독부 왜성대 청사이다.

1910년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에 등장한 1905년 을사늑약 기념사진.
대한제국 영빈관으로 쓰인 대관정에서 미국 외교관 월러드 스트레이트가 찍었다.
을사늑약은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
한일병합조약(1910)은 통감관저에서 체결됐는데
한 국가의 운명을 바꿔버린 장소가 청사도 아닌 개인 공간 '관저'였다는 것이 애처롭다.

김익상 의사가 1921년 폭탄을 던졌던 조선총독부 건물 역시
경복궁 앞이 아닌 남산 왜성대 청사였다.
김익상 의사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더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다.
그의 의거에 대한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다보면
의거의 순간뿐 아니라 모든 인생에 걸쳐 강렬하다 못해 애잔해진다.


김익상 의거터 표석은 2018년 중순까지도 남아있었으나
서울에니메이션 센터 부지를 공사하면서 함께 철거된 듯 하다.
공사가 마무리되면 반드시 재설치해주기 바란다.



앞서 말했듯 1926년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완성되자
왜성대 건물은 1927년부터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은사기념'은 1925년 다이쇼 천황이 결혼 25주년을 기념해
내린 은사금을 사용해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통감관저터 건물은 총독관저로 사용됐었으나
경무대 총독관저가 생기면서 1940년 시정기념관으로 쓰였다.
시정은 (일본이 조선의) 통치를 시작했다는 의미이며,
시정기념관에는 역대 통감과 총독의 초상화를 거는 등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선전하는 역할을 했다.
┃5. 숭의여자대학교 본관(경성신사 터), 갑오역기념비터

숭의여자대학교 입구 앞.
국치길 표석에 '경성신사 터, 갑오역기념비 터'라고 적혀있다.


좌측은 일제강점기 당시 모습이고 우측은 답사 중 직접 찍은 사진이다.
옛날 사진 왼쪽으로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이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 경성신사에 오르는 언덕길이 보인다.
신사에 오르는 언덕길은 현재 사진에서 숭의여자대학교 입구에 해당한다.
앞선 통감관저터 사진 비교와 마찬가지로 길의 모양이 그대로이다.


숭의여자대학교 입구의 모습에 계단과 오르막이 보인다.
대개 신사로 가는 길에는 매우 높은 계단이 많다.
더군다나 남산자락에 위치했던 경성신사라 계단을 오르니 구 왜성대 일대와 명동 일대가 보인다.
신사는 일본 고유 민족신앙이라 할 수 있는 신도의 신을 제사지내는 사당을 말한다.
신궁은 신사 가운데에서도 격이 높은 특별한 신사를 말한다.
경성신사는 일본 거류민들이 세운 남산대신궁이 발전한 것이며
남산대신궁이 세워진 것이 1898년 10월 3일이다.
1936년 일본 정부로부터 국페소사로 승격됐다.
일제는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황국신민화를 달성하기 위해 신사를 곳곳에 세웠다.
그 결과 1945년 일본 패망 직전까지 관페대사 2개, 국폐소사 8개, 호국신사 2개, 기타 신사 70개, 신사 총 1,062사에 이르렀다.




숭의여자대학교 교내에 경성신사에 대한 안내와 흔적이 남아있다.
숭의학교는 신사 참배에 반대해 자진 폐교했다가
해방 이후 경성신사는 해체됐고, 일시적으로 단군성조묘가 자리하기도 했으나
1953년 경성신사 터 위에 다시 숭의학교가 세워진다.


일본 신사의 빨간 관문은 도리이,
도리이를 지나 걸어가는 길은 참도,
참배하는 곳을 배전,
신체가 모셔진 신성한 공간은 본전이라고 한다.


경성신사의 섭사로 노기신사, 천만궁신사 등이 있었다.
노기신사는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한다.


숭의여자대학교 정문 어딘가인 경성신사 앞에는 '갑오역기념비'가 있었다.
'역'은 전쟁을 뜻하는데, 즉 갑오전쟁은 1894년~1895년까지 일어난 청일전쟁을 뜻한다.
일제는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에서 사망한 일본군을 추모하기 위해 1899년 기념비를 세웠다.
광복 이후 신사 철거 과정에서 함께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무엇을 형상화했는지 알 수 없으나 나에겐 흉물스런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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