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글에 이어 남산 답사 두 번째 이야기를 기록해본다.
신사와 신궁 이야기가 많이 등장할 예정이다.
아쉽게도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다.
한 번 더 기회가 되면 사진을 추가해 넣고 싶다.
| ▼본 게시물은 두 번째 이야기로, 앞선 답사로그를 읽고 오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답사로그] 남산 통감관저 터 일대 답사 (vol. 1) https://histotte-studio.tistory.com/3 |
| 남산 통감관저 터 일대 답사 코스 [사회복지법인 남산원(노기신사 터)] → [한양공원비] → [조선신궁 터(삼순이 계단)]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 [남산 방공호] → [경성호국신사 터(후암동 108계단)] |
┃1. 노기신사 터(사회복지법인 남산원)


숭의여자대학교 입구에서 왼쪽으로 갈라져 있는 길에 리라아트고등학교가 있다.
리라아트고등학교 안쪽으로 일제강점기에 노기신사가 있었다.


리라아트고등학교 안으로 들어가면 사회복지법인 남산원 건물이 등장한다.
요즘은 학교 등 아동과 청소년이 지내는 공간에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있어서
리라아트고등학교 안으로 들어갈 때에도 조심스러웠다.
경비실 선생님이 꿀잠을 주무시길래 굳이 깨워서 허락을 받고 들어갔다.


남산원 입구 앞에 놓여있는 석물 두 개.
왼쪽 석물은 신사에 들어가기 전 손과 입을 씻는 곳으로, 데미즈야라고 한다.
해당 사진은 뒷면이고 앞면에 '세심(洗心)'이라 적혀있다.
뒷면은 타카키 부부가 데미즈야 1동을 봉납했다는 내용이다.
오른쪽 석물은 뒤집어 탁자로 쓰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다시 뒤집어 저렇게 놓았다.
(정작 오른쪽 석물의 정체는 모르겠음)

노기신사에 대한 사진이 붙어 있으나 펜스가 있어 가까이에서 볼 수 없었다.
더불어, 내가 한참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남산원 아이들이 다가와
'어디에서 오셨어요?', '왜 오셨어요?', '그 이상 넘어오시면 안되거든요?' 등등
경계하는 바람에 사진을 더 못 찍었다.
경성신사 터인 숭의여대 일대와 노기신사 터인 남산원에는
신사였을 당시의 흔적들이 곳곳에 있다.
그 사진들을 찍지 못해 아쉽지만 이 정도로 만족해본다.


그렇다면 노기신사는 어떤 곳일까?
우선 노기신사는 경성신사의 섭사 즉, 주 제신을 모시는 큰 경성신사에 딸린 작은 신사이다.
일본 군인 노기 마레스케를 수호신으로 모시던 신사로 1934년 세워졌다.
노기 마레스케는 일본 육군 대장이자 제3군 사령관이었던 인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공을 세웠다.
러일전쟁에서는 뤼순과 봉천 등 주요 격전지에서 지휘해 승기를 잡았으나,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며 밀어붙인 결과였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이 원망하기도 했다.
러일전쟁에서 두 아들도 전사했으며,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부인과 함께 할복해 자결했다.
사후 명장으로 받들어져 곳곳에 그를 제사지내는 신사가 만들어졌다.
노기신사 역시 그 중 하나였다.
┃2. 한양공원 비


노기신사를 나와 위쪽으로 올라간다.
그 유명한 남산 돈까스 가게들이 즐비해있는 길을 지나간다.
(개인적으로 저 무한도전에 나왔던 왕돈까스 집 굉장히 맛있었음)

오르막길 우측에 갑자기 동그란 바닥 공간이 나온다.
한양공원 비석이 있는 곳이다.


한양공원은 일제강점기 주변에 거주하던 일본인을 위해 만든 공원이다.
어이없게도 좌측 사진에서 볼 수 있는 '한양공원(漢陽公園)' 글씨는 고종이 직접 쓴 친필이다.
비석 근처에 3개의 돌기둥이 놓여있는데
일본에서는 신사 근처 등에 저렇게 위가 뾰족하고 날렵하게 깎인 돌기둥을 놓는다.
한양공원비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주변에 8개의 쇠사슬로 묶인 뾰족한 기둥이 있었다.
경성신사 터와 노기신사 터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뒷면을 좀 더 자세히 보면, 누군가 비석의 글씨를 아주 정성스럽게 훼손한 모습이다.
덕분에 사람들 사이에서 이 내용에 대한 온갖 추측이 난무했는데,

당시 사진으로 지워지지 않은 글자들을 해석할 수 있었다.
내용은 아래와 같고, 사실 별 거 없다.
| 한양공원기 경성은 조선의 대도시이나 보고 즐길 곳을 결여한 지 오래인지라, 사민[士民]이 이를 유감으로 여겼더라. 그리하여 때는 명치[明治] 무신년(1908년)에 유지들이 일대 공원을 설치하기로 서로 모의하여 남산 서쪽 끝산림이 으슥하고 옹울한 곳에 자리를 정하면서 관[官; 한국정부]에 윤가[允可]를 청하였고, 이에 인부를 부려 공역을 거쳐 토석을 걷어내고 숭비[崇痺, 높고 낮은 곳] 곧 애초[崖峭; 낭떠러지와 가파른 곳]를 고르게 하며 도로를 열고 월아[月阿]를 짓고 풍계[風階]를 만들어 재열년[再閱年; 2년 이상이 걸리는 것]에 완성이 되니 명명하길 한양공원이라 하였는데 사시의 경치가 조망을 갖추어 가장 아름다운 곳이 아니리오. 경성거류민단이 유지의 청에 따라 금일에 이르기까지 이를 관리하였는데, 이에 유지의 씨명으로써 새겨 후세에 전하노라. - 명치 45년(1912년) 3월 경성거류민단 민장 코죠 칸도- |

일제강점기 남산 아래에는 일찍이 일본 공사관이 자리잡고 일본 거주민이 살았다.
남산 일대는 조선시대에 왜성대라고 불렸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주둔한 마을'이란 의미에서 비롯됐다.
구한말 일본은 왜성대에 모여살며 신사뿐 아니라 공원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왜성대 공원, 이후 경성공원, 한양공원을 거쳐 지금은 남산공원이라 불리는 것이다.
일제는 유락 공간이 공원에 꽤나 진심이었던 듯 한데, 특히 남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남산 동쪽 기슭에 1900년 고종의 명으로 세워진 장충단이 있었다.
일본군과 맞서 싸운 이들을 제사지내기 위해 만든 일종의 국립묘지였으나,
일제는 이곳에서 이토히로부미 추도행사를 여는 만행을 보였다.
그리고 1919년, 장충단을 헐고 수천그루의 벚나무를 심어 공원으로 만들었으니 그것이 장충단공원이다.

그러던 한양공원은 1920년부터 시작된 '조선신궁'의 설립 터로 선정되어 완전히 외면받는다.
조선신궁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에서 더 해보기로 한다.
┃3. 조선신궁 터(삼순이 계단)

한양공원에서 더 올라가다보면 촘촘하게 높은 계단이 하나 나온다.
지도를 보며 갔는데 본능적으로 이 계단은 아닐 거라며... 살짝 지나쳤었다.


사실 맞았다. 그렇다. 이 계단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신궁으로 오르던 계단 중 하나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 드라마의 엔딩 장면에 나온 것으로 유명해 삼순이 계단이라 많이 불린다.
무한도전에서도 나왔던 것으로 유명한데,
사실 이 계단은 신궁으로 향하는 길인 것이다.


1920년 일제는 조선신궁 착공에 돌입했고, 1925년 조선신궁이 완공됐다.
신궁은 신사보다 더 높은 시설로 조선신궁에서는 일본 건국 신화의 주인공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을 모셨다.
국가 의례가 진행되는 관폐대사, 일왕 대리자인 칙사가 예물을 바치는 칙제사의 격을 단 규모와 위엄을 가진 곳이었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일본의 식민지 중 칙제사는 조선에 세워진 조선신궁이 유일했다.
하지만 일제하 한국인들은 천황 숭배를 위해 강제 참배를 행한 곳이었다.


발굴 과정 중 아래에서 한양도성 흔적이 발견됐다.
일제는 조선의 흔적과 정기를 말살시키고 일본제국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남산에 신궁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신궁의 모습이다.
사진으로만 봐도 매우 거대한 크기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우측 사진에서 보듯 멀리서 조망한 사진에서도 산 중턱에 눈에 띄게 하얗고 큰 조선신궁을 바로 찾을 수 있다.
계단의 개수는 384개이다.

조선신궁의 규모와 삼순이 계단의 당시 위치가 궁금해 항공샷과 현재 지도를 겹쳐보았다.
배전터 위치를 사진 속 배전 위치와 맞춰보니 대략 크기가 가늠됐다.
현재의 한양도성유적전시관 일대, 안중근 기념관 인근, 백범 광장까지가 모두 조선신궁 영역이었다.
빨간색 네모로 표시된 것이 삼순이 계단 위치인데, 당시 사진으로 비춰보면 눈에 띄진 않는 위치이다.


해방 직후 일제는 자발적으로 조선신궁을 해체했다.
그 자리에는 놀랍게도 스키장(남산 스키장)이 들어섰다.



하지만 1956년 8월 15일 스키장이 헐리고, 이승만이 자신의 80세 생일을 기념해 본인의 24m 초대형 동상을 세웠다.
해당 동상은 4·19 혁명 당시 파괴되었으나 2011년 다시 세워져 논란이 일었다.


현재는 한양도성유적전시관이 자리하고 있고, 인근에 안중근 기념관과 백범 광장이 있다.


전시관 옆 한 켠에는 조선신궁 배전터가 남아있다.
배전은 신사나 신궁에 방문하여 실제로 참배하는 곳을 말한다.
┃8.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삼순이 계단을 올라서 바로 앞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동상이 있다.
2019년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이 직접 제작해 기증했다.
세명의 소녀들은 각각 한국, 중국, 필리핀의 소녀들이고
4개 방향 중 비어있는 한 방향에 서서 누군가 소녀들의 손을 맞잡았을 때 완성되는 작품이다.
소녀들을 바라보는 이는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최초로 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이다.
일본군 '위안부'로 극심한 고통을 겪은 이들은 북한에도, 해외에도 있었다.
하루 빨리 일본의 진정어린 사과가 있기를 이 악물며 바란다.
┃9. 남산 방공호



방공호는 적의 공습 등을 피하기 위해 만드는 군사 시설이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앞두고 경성에 방공호 1만개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1937년 11월 일본칙령 제661호 방공법 조선시행령에 따른 결과다.
방공호 모형을 전시한 박람회를 개최하는 등 1940년대에 건설을 적극 독려했다.
┃10. 경성호국신사 터(후암동 108계단)

조선신궁터를 나와 또 다른 계단으로 내려온다.

길목에 많이 피어있던 애기똥풀.
귀여워서 찍어봤다.

가는 길에 또 다른 계단을 만났다.
조선신궁 크기가 워낙 방대했기 때문에 이 역시 조선신궁으로 향하는 계단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계단 밑에는 양쪽에 커다란 돌이 세워져있었다.
가운데에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지운 듯한 흔적도 보였다.
오히려 삼순이 계단보다 중요한 역할을 했을 법도 한데,
이 돌기둥과 계단에 대해서는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아쉽다.


좀 더 가다보면 남산도서관이 나온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두텁바위 마을 표석이 있다.
옛날에 남산 밑에 동그렇고 두터우 바위가 있었는데,
아이를 가지려는 여성들이 바위에 와서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 이름에서 비롯된 두텁바위 마을은 용산구 후암동의 별칭과도 같다.


과정이 모두 생략되었지만 후암초등학교를 돌고 한참동안이나 걸어 내려와 회전교차로에 다다랐다.
교차로 한쪽 길에서 일명 '후암동108계단'을 만났다.


양쪽으로는 계단이 있고 가운데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일부 커플과 20대 방문객들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며 신기해했다.


이 곳 108계단은 일제강점기 경성호국신사로 향하던 계단이다.
태평양전쟁으로 전사자가 늘어나자 전사자 추모의 공간으로서 야스쿠니 신사 지부격인 호국신사가 곳곳에 세워졌다.
경성호국신사 역시 그런 곳들 중 하나로 1943년 완성됐다.


전사자를 참배하는 신사답게 남아있는 몇 안되는 사진은 참배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일제는 일본인 전사자뿐만 아니라 강제징집된 한국인 전사자까지 이곳에서 추모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일제는 패망했고, 경성호국신사도 사라졌다.
1963년 하수도공사 사진에서 뒷편에 남아있는 108계단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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